기독교 칼럼 (이근형 목사) – 받아들이면 된다.
예상을 뒤엎는 일이 일어났다. 잘못한 일도 없다. 예배를 쉬었던 것도 아니다, 전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나한테 그러냐고?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묻는다. 팬데믹이 돌았던 것도 아니다. 가축들이 시름시름 앓는다. 자녀들도 당했다. 아내도 집을 나갔다. 은행들이 줄도산하듯이 그렇게 무너졌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일은 의인 욥이 당한 일이다. 산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그것은 항상 ‘군중 속에 고독’과 같다. 인생은 고독을 안고 살아간다. 그 고독의 출구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주 예수의 주제는 서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성령의 사랑이고 믿음 안에서의 사랑이다. 고독을 넘을 수 있는 사랑이다. 가장 높은 수준의 사랑이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합쳐놓은 사랑이다. 무조건 사랑이 답이라는 말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욥의 가족사랑은 불안에 둘러 쌓인 축복이었다. 그리고 ‘풍요 속의 빈곤’과 다를 바 없는 의무감에 쌓인 사랑이었다. 욥에게 불안과 빈곤과 고독은 언제든지 따라 다녔다.
욥은 이 3가지의 역경 앞에서 한 번도 하나님에 앞에서 흔들린 적이 없었다. 마음이 불안할 때 마다 욥은 제사에 정성을 다했다. 정교한 제사의 힘으로 버틴 것이다. 죄를 미리 차단하는 매우 탁월한 방법이 제사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욥의 주인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도 욥의 정직과 온전함과 경건을 인정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 였다.
그러나 욥의 집이 언제나 에덴 동산만은 아니다. 난동을 부리며 에덴을 허물었던 사탄의 계략이 시작된다. 그 계략이 하나님께 허락을 받은 계략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과 사탄의 공동 프로젝트는 의인 욥을 진짜 의로운 욥으로 변화시키려고 하는 프로젝트 였다.
다 망한 욥은 말한다. 주신이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욥이 가진 욥의 힘이었다. 욥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이었다. 이것을 소위 계명이요 율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욥의 가정의 가훈과도 같고 욥의 좌우명이었고 욥의 전부를 한 줄로 정리한 말이었다. 이것이 무너지면 의인 욥도 무너진다. 욥이 무너지면 하나님도 의인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하나님이 허락한 고난은 반드시 축복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가질때, 어찌보면 욥에게 닥친 고난은 자기 자신의 실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단 한 번 있는 기회이고 욥이 진짜 욥이 될 수 있는 절호의 세컨 찬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의도가 여기에 있다. 욥에게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비밀된 섭리가 가동되었다. 십자가의 고난이 부활로 그 능력이 입증되었듯이 약함이 강함이 된다. 복음의 소망이 욥의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게 된다.
성령 하나님의 목표는 율법의 하나님에서 복음의 하나님에 이르려는 데에 있다. 율법의 사람 욥을 복음 안으로 불러들였다. 욥의 영혼은 폭풍 속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마음은 평안이다.
하지만 욥에게 그런 하나님의 속마음같은 평안이 처음부터 알려진 바 없었다. 폭풍 속에 있는 욥에게는 결과가 알려진바 없는 고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는 누구든지 쉽게 동의할 수 있게 된다. 왜 하나님은 미리 말해 주지 아니했을까? 욥에게 복음을 미리 말을 해 주었다면 욥은 또다시 자신의 의와 신념 그리고 부의 풍요와 축복의 우산 아래서 머물면서 자신이 살아온 축복의 방식 그대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면 욥은 그저 욥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이 저주다. 그래서 고난이 축복이다. 그러나 그 고난이 복음과 붙어있을 때만 축복이 된다. 욥이 동방의 의인이 아니라 하늘의 의인이 되어야 했다.
모든 고난은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해법이 있다. 욥에게는 그 고난을 받아 들이는데 7일이 걸렸다. 7일 후에 성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방어하고 변명하기 시작했다. 속에 잠자고 있던 쓴뿌리가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들추어냄! 은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은혜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이다.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힘이다.
욥은 그렇게 했다. 병든 몸보다도 통제 불능이 된 자신의 신앙 속에서 해소되지 않는 문제들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의 설득과 화려한 웅변과 미사여구에도 자신을 내려 놓거나 쉽게 동의할 수가 없었다. 꿈쩍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끽소리 못하고 당할 수만은 없기 때문에 중언부언같은 욥의 변명은 속에서 계속 나오고 있었다. 이것이 영혼의 고단함이다. 영혼의 씨름은 어쩌면 인생들에게 평생 걸린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니 어떤 종류의 인생이라도 인생이 욥기를 읽기 시작했다면 가장 처음에 필요한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는 정직이다. 정직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앞에 서는 일이다.
그 후 정직은 회개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회개는 나의 회개에서 성령의 회개로 바뀌면서 영혼의 고통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성령의 탄식이다.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은 신비다. 그래서 기도는, 성령은, 그리고 말씀은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의 일상과 함께 있다. 얼마나 우리가 인생 중에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도와 달라고 간구를 했었던가!
그런데 좀 살만하니까 기도를 쉰다. 좀 있으니까 묵상을 멈춘다. 이 계산서는 잘못되었다. 성경은 족보책이다. 그 족보는 현손이라고 해서 5대째 이상 내려간다. 나의 소유와 그리고 지금의 축복이 나의 축복으로 멈추지 않게 하려면 있을 때 잘해야 하고 편할 때 영적 경건의 고난과 즐거움 안에서 살아있는 영적 유산을 물려 줄 준비를 늦추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욥은 자신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복도 주시고 화도 주시는 자신의 율법을 지키는 데 몰두했다.
욥의 몰두는 결국 자기 의가 되고 말았다. 이대로 두면 욥은 일을 하다가 그만 둔 사람처럼 반쪽 인간의 불명예를 벗어날 길이 없다. 이것을 타겟 삼아 하나님은 영적전쟁의 첫 화살을 욥에게 쏜 것이다. 마취도 없었다. 욥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소리소리를 질렀다. 그 아픔 속에서 욥은 하나님이 쏜 독을 마셨다고 말했었다. 영혼의 치료가 가장 아프다. 영혼을 덮고 있는 죄와 허물을 제거하는 영적 수술이기 때문이다. 그 수술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다. 그래야 결과가 보장된다. 병든 몸과 병든 영혼의 수술시간은 평생 걸린다.
하나님은 욥을 온전한 인간으로 다시 만들고 있었다. 욥은 여전히 종교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복음은 욥을 성령의 눈을 가진 성숙한 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갑절의 축복을 받은 진정한 의인으로 다시 창조한 것이다. 욥은 모든 시험을 통과했다.
성경 밖에는 답이 없다. 그리고 공부해서 아는 성경의 지식이 있다. 기도해서 받은 영적인 말씀이 있다. 고난의 현장에서 체험한 삶의 진수가 있다. 신앙은 이들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이것을 말하고 있고 이것이 거듭남의 과정이다. 받아들이면 된다.
이근형 목사 (맥알렌제일한인장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