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갖고 삽시다 (누가복음 24:13-35)

1. 들어가는 이야기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다. 희망 없이 산다고 하는 것은 삶을 중단하겠다고 하는 것과 똑같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희망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희망이 오늘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 때 무려 2만 명의 미군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 보니까 그 중에 8000명이나 사망을 했답니다. 종전 후에 미 국방성에서 조사단을 파견해서 살펴보니까 죽은 사람들 대부분은 놀랍게도 굶주려서, 심한 학대를 받아서, 질병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고 바로 절망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희망이 없고, 앞으로 살아서 돌아갈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그 삶이 너무 쉽게 무너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쉽게 죽어간 이유가 바로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독일 나찌 치하의 유대인들은 600만이 학살을 당하는 끝없는 절망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끔찍한 절망 속에서도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들이 수감생활을 했던 지하 감옥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 감옥 콘크리트 벽에 손톱으로 긁어서 새긴 글귀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저 하늘의 태양을 볼 수는 없지만 분명히 태양이 빛나고 있음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들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희망을 가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얼마나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에 많은 차이가 납니다. 똑같은 조건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삶은 힘이 넘치고 역동적인 삶이 됩니다. 그러나 희망을 포기하면 그 삶은 무너져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제자는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 면은 희망을 잃은 사람의 모습이고, 또 다른 한 면은 희망을 가진 모습입니다.

2. 희망을 잃은 모습의 두 제자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따르던 사람들임은 분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어서 고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13절)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12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입니다. 두 사람이 엠마오를 향해 쓸쓸하게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17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슬픔이 꽉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16절)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라고 했습니다. 눈이 가려져서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리니까 3년 동안 함께 했던 예수님을 불과 며칠 만에 다시 만났는데도 알아보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3. 희망을 가진 두 제자의 모습
오늘 말씀에 보면 두 사람이 다시 희망을 되찾는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리고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사람이 다시 밝고 희망차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변화가 되었습니까? 그렇게 달라진 이유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15절)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예수님께서 절망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뭡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찾아와 주셨다는 것입니다.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소원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찾아 헤매는 그들의 어떤 노력으로 인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도 아닙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이미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만나 주신 사람들만 부활의 신앙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1)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고 했습니다 (31절)
‘저희 눈이 밝아져’ (31절) 앞에서는 눈이 가려졌었는데 지금은 그 가려졌던 눈이 다시 밝아졌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눈에서 볼 수 없게 하는 것들이 벗겨집니다.
세상의 욕심들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같은 비늘이 벗겨져야 우리가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2)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했습니다 (32절)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은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결단력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3) 두 제자는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 (33절)
두 제자의 행동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곧 그 때로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먼저 그들이 곧장 일어서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즉시 일어났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어두운 밤중입니다. 엠마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서 예수님은 더 가시려고 했지만 그러지 말고 함께 유숙하자고 간청을 했습니다. 즉 날이 어두워서 이동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소식이 너무 기쁜 소식이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둠도 무시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말씀으로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류복현 목사 (킬린한인침례교회 담임목사. 254-289-8866)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