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칼럼 (이근형 목사) – 예수. 영적 검색엔진의 창시자

검색의 시대다. 예언자 다니엘이 그렇게 예언했던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더라.” 믿는 자들은 성경검색으로 많은 이익을 얻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설교 듣는 것보다 더 좋은 검색은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믿음이 검색시장에서 싸우도록 더 많은 영적인 콘텐츠가 업로딩 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하는 건 예수님을 검색하면서 다른 검색에 미끄러져 옆으로 새어 나가서는 곤란하다.
축복은 어떤 조건이 전제되어 있다. 먼저 하나님을 찾으라는 조건이다. 예수님의 검색엔진은 구글이나 네이버가 아니라 영적 검색이었다. 그것은 천국의 말씀이었다. 예수님의 지혜와 삶의 방식은 그 검색을 통해서 흡수되었다. 그 검색은 기도를 통해서 왔었다. 우리의 검색엔진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AI의 알고리즘에 걸려있다. 그 검색의 한계는 하나님과 일대일의 교제가 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적 엔진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라는 대전제에서 나온다. 성경은 고맙고 감사하게도 그 영적 엔진이 영원히 지속되는 길을 모두 안내해 놓았다. 그것은 세상에서는 검색이 안 되는 영역이다. 영적인 사람과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에서 검색이 되어 나온다. 이것을 일용할 양식이라고 하면 동의할까? 이것은 예언자들의 예언이었고 제사장들의 위로의 도구들이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 지혜는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이 저절로 오지는 않으니 간절히 은을 찾듯이 찾는 자의 것이라고 했다.
찾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키라고 했다. 지킨다는 것이 ‘행동하라’가 아니고 간직하라는 뜻이다. 그 간직된 지혜가 마음에서 무르익을 때면 열매가 되어 나도 살고 너도 살리는 좋은 일이 생긴다. 좋은 말이 입에서 나온다. 이것을 성경은 땅의 복이라고 했다. 잊어서는 안된다. 기도를 못하게 유혹하는 이 시대의 검색 엔진들의 편리와 유혹을 극복해야 삶의 질이 좋아진다. 영적 엔진은 기도를 통해서 작동된다. 검색의 시대는 기도를 모두 빼앗아간다. 영적 검색을 통해서 세상에서 나오는 것을 차단해달라고 기도하면 좋다.
이제 이런 인류는 공의의 사람과 사랑의 영적 사람으로 살 수 있다. 하나님이 기대하는 사람이 나온 것이다. 이 사람은 영적 새 인류가 된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사는 사람이다. 그것이 정직이고 공의이고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쓰지 않으면 뭐든지 녹슬고 마는 것이 물건들의 약점이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지 물건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영적인 말씀의 문제였다. 말씀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예수님의 사람인가 아닌가가 결정된다. 말씀은 영적으로 읽어야 한다. 성경은 믿음을 말하면서도 새 믿음을 말한다. 노래를 말하면서도 새 노래를 말한다. 그와 같이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새 말씀을 말하고 있음에 초점을 두고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다.
새 믿음, 새 노래, 예수님의 새 말씀이 모두 영적인 세계의 일들이다. 그러나 단순히 믿음, 노래, 예수님은 땅의 일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말했었다. 너희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잘 알지 못하겠거늘 어찌 하늘 일을 말한들 알 수 있겠냐고 물은 적이 있다.
믿음에 관하여부터 먼저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태어나자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선민이었다. 이들은 특히 가족을 가장 소중히 여겼다. 가족들 간의 유대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믿음의 리듬을 타고 가족의 축제와 잔치를 즐기고 가족들과 아주 많은 시간을 같이 하면서 가족사랑이 세계선교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절기들만 즐겁게 따라가도 그들의 일상은 일년 내내 축제 일 수 밖에 없었다. 이 가족들은 검색을 잘한다. 조상들에게서 부터 내려오는 모든 좋은 신앙전통이 그들의 검색창고이다. 그 검색엔진은 부모의 입에 있다. 온 세계가 부러원하는 축제들과 절기 들을 가지고 있다. 태어나면 복이다.
그들은 모여서 말씀을 읽는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읽는다. 그뿐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축복은 한 민족이 담고 살기에는 넘치고도 넘쳤다. 성경이 복에 복을 말한다. 복중의 복을 가진 이스라엘은 안식일이면 온 가족이 모여서 복을 찬양하고 진짜 복을 연구하고 질문하고 대답하는 그런 영적인 믿음의 가족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는 이 일이 되게 하는 곳이면 족하다. 가족들에게 제자훈련을 하면서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라’는 시편의 말씀을 붙잡고 온 가족이 기도하면서, 나라를 세우시고 나라를 이끌고 나라를 책임지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복을 누릴 줄 아는 백성들이 그들이다. 주를 앙망하고 살면 헛생각이 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제사장이기 때문에 어머니를 얼마나 위로하고 사랑하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한 남편으로 섬기면서 자녀들을 어린 감람나무 보듯이 보듬고 키운다. 전쟁을 많이 겪으면서 겨우 남은 사람들, 가족도 민족도 생존이 불가능한 속에서도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모여서 믿음을 지켜왔다. 그러나 다른 민족을 보면 똑같은 시련을 겪었어도 남길 것이 별로 없었다. 그것이 불신앙의 비극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노래하는 것을 배운다.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한다고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돈으로 즐거원한다. 그것 밖에 모른다. 그 노래가 수십만 군사들의 침략을 멈춰 세우게 했었다. 여호사밧도 이방 나라의 침략이 올 때 대책이 없었다. 찬양대를 앞세우고 노래를 부르며 전장에 나간다. 적들이 모두 사라졌다. 하나님의 노래는 그 어떤 무력보다도 강했다. 그러면 새 노래의 효력은 어느 정도일까? 그것은 거의 신의 수준에 이른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했다.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찬송하게 하리라!고 선언했다. 찬양의 책인 시편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이렇게 시작하더니 뒤에 가서는 새 노래로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새 노래가 무엇인가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것은 겸손의 노래였고 그것은 인생의 최후 심판을 이기는 판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시149편) 대단한 노래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찬양하라! 찬양은 겸손의 최고의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겸손이 심판을 이긴다. 누가 이 노래를 불렀을까? 새 노래는 예수님의 노래다.
이제 예수님을 생각해 본다. 예수는 광야에 매달려 장대에 걸려있는 구리뱀과 같았다고 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높이 달려 있었다. 그의 십자가를 쳐다보기만 해도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다. 쳐다보지 않는 사람도 수십억이다. 예수 십자가는 몸은 죽어도 영혼이 구원받게 한다. 그 것이 그때 그 구리뱀과 다른 점이다.
광야의 불뱀들에게 물렸던 사람들이 장대에 매어놓은 뱀을 보다가 고침을 받았었다. 병원의 심볼이 구리뱀으로 된 것이 그런 연유에서 였을것 같다.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장대에 달린 구리뱀과 십자가에 달려 뱀을 잡은 예수의 희생이 영육간에 해방을 만들었다. 이제 새 믿음으로 간다. 그 새 믿음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다. 그 말씀을 듣고 행하면 모든 성경은 이루어진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검색엔진이다.
자동차는 엔진의 힘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 새 믿음, 새 노래, 예수님의 새 말씀들은 영적엔진 속에서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의 영맥을 따라 오늘에 이르렀다. 엔진 선택을 잘하는 백성이 하나님의 영적 백성이다. 영적 엔진의 검색능력은 기도하는 일이다. 이사야는 말한다. 이런 영적 엔진이 필요한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고 했다. 목마른 자도 돈 없는 자도 오라고 했다. 정말 좋으신 하나님이다.

이근형 목사 (맥알렌제일한인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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