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칼럼 (송영일 목사) – 선한 일을 자랑하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어느 미국 선교사가 중국에서 선교사역을 하면서 일어난 이런 실화가 있다.
중국에 가서 선교하는 미국 선교사가 있었는데 잠을 자다가 집이 통째로 홍수에 떠내려가게 되었다.
그 선교사는 꼼짝 못하고 홍수에 휩쓸려 죽게 되었는데 어느 젊은 사람이 강둑에서 밧줄을 던져주어 겨우 밧줄을 붙잡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올 수 있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다시 살아났으니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그래서 그 청년에게 당신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서 일생동안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그 청년이 빙그레 웃으면서 “성경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름이 있습니까?” 라고 말하고 그냥 말없이 떠나 가더라고 했다.
감동적이지 않는가?
선한 일은 이름이 없어야 한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선행이다.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
가까이 가서 도와주고 싸매 주고 돈 들여 끝까지 돌봐 주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는 일이다.
보스턴에서 신학공부를 할 때 유대인 교수의 구약학과목을 신청하여 들었다.
Bernard Anderson박사는 당시 명망 있는 구약학 교수였다.
그 교수의 과목을 들으면 꼭 한 번씩 유대인의 회당에 견학을 할 수가 있었다.
Boston에서 New York까지 School Bus를 타고 약 4시간 반에 걸쳐 뉴욕의 Jews Twon에 있는 회당을 갔는데 그날 랍비의 설교가 바로 “누가 내 이웃인가?”였다
랍비의 설교는 10분을 넘지 않았다.
랍비는 구약성경에 나온 모세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생할 때 바로 왕이 유대인 아들을 낳으면 다 죽이라고 산파들에게 명령을 했다.
산파가 유대인 집에 가서 모세라는 어린아이를 받아보니까 차마 죽일 수가 없어서 긍휼을 베풀어 살려주었다.
랍비는 바로 그런 사람이 이웃이라고 했다.
내 편에 섰기 때문에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이웃이라고 했다.
이것이 유대인 랍비가 말한 이웃의 개념이었다.
어느 날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누가 내 이웃입니까?”(눅15:29)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유대인 랍비와 같은 이웃의 개념을 가지고 질문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웃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
한 유대인이 여리고에서 강도를 만나 모든 걸 다 빼앗기고 죽음직전에 이르렀다.
마침 한 유대인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죽어가는 유대인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두번째로 등장한 유대인 레위인도 죽어가는 같은 유대인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세번째로 등장한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다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응급조치를 해 주고 자기가 타고 가던 당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상종하지 않았다.
그토록 멸시천대 받은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사람을 불쌍히 여겨 구제를 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초점이 있다.
사마리아인은 비록 자신을 멸시했지만 지금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었다.
사마리아인은 내가 먼저 원수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너희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눅15:37)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웃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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