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칼럼 (송영일 목사) –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서에 총 13차례 등장한다. “막달라” 동네는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염색업과 직물업이 발달한 곳이다. 한때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흉측한 모습으로 살았으나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이후 예수를 따르며 극진히 섬겼던 여제자(막16:9; 눅8:2)이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의 무덤의 첫 방문자로 막달라 마리아가 소개된다. 가서 보니까 무덤을 막아 놓은 돌이 옮겨져 있었다. 그녀는 놀래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요20:2)고 제자들이 모여 있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달려갔다. 베드로와 제자 요한은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라서 곧바로 무덤을 향해 달려갔다(요20:3). 그런데 웬일인가! 그곳에 정말 예수님의 시체가 없었다.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 부활을 믿지 못한 그들은 어떤 행동을 보였는가?
“이제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10)
그렇다. 부활을 믿지 못한 사람들의 인생은 말 그대로 허탈한 인생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끝까지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무덤 밖에 서서 홀로 울고 있었다. 일곱귀신이 들려 처참한 상황에 있었을 때 찾아오셔서 귀신을 내어 좇아 주시고 치유해 주셨던 주님의 은혜를 생각했다.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이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새생명을 부어 주신 분이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여기서 “울었다”는 뜻은 큰소리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엉엉 울며 가슴을 치듯이 통곡했다는 뜻이다.
그냥 갈 수 없어서 그녀는 한 번 더 예수님의 무덤속을 들여다보고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흰옷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이 누운 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녀 뒤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에 즉시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부활의 형체는 뭔가 생시의 모습과 다를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마리아에게 이렇게 다시 물으셨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15)
마리아는 여전히 죽은 시신을 찾고 있었다. 우리는 어떤가? 날마다 부활하신 예수님 승리하신 예수님을 찾고 있지는 않는가?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부활을 믿지 못한 모든 성도들에게 하신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염원이 너무나 강했던 나머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 부활의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나는 축복의 기회를 얻었다. 그녀는 부활의 첫 목격자로 복음전파의 사명을 받은 여제자가 되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셨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임받았다. 이어서 마리아는 주님의 분부대로 부활의 “복음”(유앙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을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명에 순종했다.
주전 490년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그리스를 침략했다. 페르시아 군은 승승장구하며 아테네를 공격했다. 결국 모래 광야에서 모래폭풍을 일으키며 아테네군과 페르시아군 사이에 대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국가의 존망이 위기 앞에서 아테네 병사들은 일당백의 용맹으로 목숨을 걸고 싸워 크게 승리하여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이때 “페이디피데스”라는 아테네의 한 용사가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승리의 소식을 본국에 알리기 위해 26.22 마일을 달려가서 아테네 국왕 앞에 승리의 기쁜소식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쉴 새 없이 달려오느라 탈진한 그는 승리의 소식만 전하고 최후를 마쳤다. 이 전투가 벌어진 모래 광야의 이름이 무엇인가? 마라톤이라는 곳이었다. 지금의 마라톤 경기는 당시 승전보를 전하던 똑 같은 거리를 이 승리의 소식을 기념하기 위해 생긴 것이다.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숨이 끊어지도록 달려간 용사의 심정이 이해가 되는가? 이 승리의 소식을 아테네 시민들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을까? 이 승리의 기쁜 소식을 자기의 가족들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래서 “페이디피데스”는 목숨을 걸고 달려가서 이 승리의 소식을 전한 것이었다. 이런 승리의 소식을 헬라 사람들이 뭐라고 불렀는지 아는가? “유앙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 “기쁜 소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것이 복음이다. 승전보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다고 전하는 복음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를 상속받은 상속자가 되었다고 전하는 복음이다. 얼마나 좋은 소식인가?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신 복음이다.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고 죽음에서 승리하셨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해 주셨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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