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정순광 지국장) – 고구려의 대륙정벌과 광개토대왕의 꿈

광개토대왕비를 통한 최근 중국의 동북 삼성의 역사왜곡에 대한 역사적 고증 확인
By 정순광 지국장
skjung6511@hotmail.com


1983년 고3시절, 학력고사를 앞둔 수험생으로서 나에게 역사공부라기 보다는 ‘대륙의 꿈을 꿨던 정복의 왕’으로 각인되었던 광개토대왕의 일대기는 새로운 발견과 같았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감사하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남해안의 작은 도시 삼천포라는 지역에서 학교를 다녔던 나는 누구보다도 고구려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말했고, 혹자는 이를 이용하여 “21세기 세계가 하나되어 돌아가는 날이 온다면 나는 그 중심이 동북아일 것으로 믿으며, 그 핵심은 한국의 홍익인간 사상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라고 토인비의 역사풀이를 한반도의 상황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았다.
문학적인 표현으로 토인비의 말을 풀어보면 그것은 아마 이런 내용일 것이다. 동북아시아를 돌아보면 한국과 중국의 역사가 보인다. 그때의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과거 고구려의 많은 왕들은 대륙을 향한 무수한 꿈을 꿨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조상,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은 활을 잘쏘아 고 주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오늘은 그의 후손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한 사람인 광개토대왕을 다시 돌아보자. 그리고 그 광활한 대륙을 정벌하면서 보여준 업적을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비인 ‘광개토대왕비’를 통해 이에 새겨진 역사적 진실에 접근해보자.
‘광개토대왕비’는 내가 역사를 배울 때 알게된 이름이다. 이 비의 높이는 6미터 이상으로 새겨진 글자수는 1775정도의 웅장하고 장엄한 응회암으로 만든 비석이다. 현재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 이라는 곳에 세워져 있다.
고구려 황제 광개토대왕의 연호는 ‘영락(永樂)’이라는 것도 이 비에서 밝혀졌다. 연호가 사용된 것도 이즈음의 광개토대왕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단군 조선이 멸망하여 갈라진 삼한(三韓- 진한, 변한, 마한)을 하나로 통합하는 국가적 비전 사업은 어린 나이였던 대왕의 숨겨진 꿈으로, 평생을 바쳐 이루려 한 흔적도 이 비에 적혀 있다. 그는 374년에 담덕 혹은 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고국양왕의 아들로 태어나, 413년에 39세로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재위기간 22년 5개월 동안 한강이북과 동북삼성을, 그리고 이웃 나라 중국을 위협하고, 반도국인 고구려를 대륙으로 향하는 꿈을 실현시킨 대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을 연구한 한 역사학자는 이것을 “한반도, 일본열도, 만주와 옛 단군조선 영토를 거쳐 이룬 ‘영락대통일(永樂大統一)’의 큰 여정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역사의 유유한 흐름은 자식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위대한 승리의 현장에 후손들에게 알려줄 역사적 사실을 만드는 작업은 아들 장수왕의 몫이었다. 그는 즉위(412년 즉위)하자마자 시작하여 약 3년 뒤 서기 414년경에 이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공적비는 건립된 후 잊혀져 가는 유물이 되어버렸다. 대한민국 우리의 역사가 우수한 조상들의 업적을 알아보지 못하고 스스로 작은 한반도에 국한시킨 까닭에, 조선시대까지도 ‘광개토대왕비’를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 황제의 비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비의 조사시기를 1880년 무렵으로 본다. 길림성에 세워져 있던 능비를 새롭게 조사한 결과 고구려의 19대 광개토대왕 비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비문의 내용은 단군조선 이후에 갈라진 민족과 나라를 하나로 대통합 하였고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일본이나 중국 등 위치의 정치지형을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이 비를 기록하는 등 역사적 왜곡이 존재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학설도 나왔으나, 어김없는 사실로는 고구려의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현재의 한반도에 국한된 영토의 한계로 인해 고구려인의 위대함은 역사적 사실로만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장수왕 이후 남진정책을 통한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결정은 무수한 전쟁을 이유로 현재의 지형으로 굳혀져 가는 형태이나, 언젠가 수복해야 할 고토의 땅으로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진 숙제이기도 하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강 이북이 그들의 주 활동 무대였으며, 수나라와 당나라 등 한(漢)족과 세력을 겨루며 문명대국을 이룬 밝고, 큰 국가였으나 중국 사관에는 동이(東夷)라는 용어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비와 관련된 중국의 상황을 확인하고자 한다. 많은 뉴스를 장식했던 내용이자 한국의 역사학자들에게 익히 알려진 것으로, 중국은 2002년부터 고구려 지역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해 학자들을 앞장 세워 ‘동북공정’이라는 역사 왜곡을 자행하고 있다. 최근의 상황까지도 본다면 중국은 50여개의 소수민족의 독립기회를 주지 않고, 한쪽으로 귀속 및 복속 시키려 하며 그들만의 중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즉, 대륙의 위상을 자랑하기 위해 그 뿌리를 조작하는 행위를 이미1980년대부터 중국 정부는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최근에는 불에 기름을 붓듯 발해사(史), 단군조선사도 중국역사라고 발표하기 시작하고 있다.
고구려 역사가 중국 역사라면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한 후에 생긴 발해와 고려도 중국 역사가 되고 한강 이북부터는 모두 중국 역사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의 영향력에 놓인 소수민족들이 차츰 중국화가 되어가는 이즈음에, 길림성의 광개토 대왕비를 보면 대한민국의 위대함을 볼수 있고, 고구려 문화의 우수성과 역사적 가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위대한 것임을 알수 있다.
중국의 가랑비에 옷 젖게 하는 전략은 현재의 정치인들의 수수방관하는 자세와 역사 인식은 미래세대에 좋지 않은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농후함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한국의 역사인 고구려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둔갑시켜 서서히 잠식하려 나올 것이다. 머지않아 그렇게 될 때에 대륙정벌의 선봉장인 광개토대왕, 고구려의 위대한 장군 살수 대첩의 을지문덕, 안시성의 영웅 양만춘, 고구려 마지막 대막리지 연개소문, 발해 태조 대조영, 고려의 전략적 외교관 서희가 얻은 강동6주,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 등은 모두 중국의 역사적 인물들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을 가만 볼 수가 없음에 작은 고증이나마 알리고 싶은 심정이다. 고구려를 알려면 웅장한 대륙을 향햔 해양세력의 발원을 주시해야 한다. 과거 좁은 반도사관, 친일에 기울어진 사관, 훈구 세력의 사대주의 사관의 역사로는 고구려를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관은 만주벌판을 달린 대제국 기마민족, 대륙의 한족과 동일한 시기의 역사적 사실과 대등한 문화, 그리고 전쟁을 통한 승리의 업적 등 우리 선조인 대민족 고구려가, 특히 젊은 대왕 광개토대왕이 남긴 뜨거운 열정으로 우리들의 가슴에 다가온다.
토인비가 내다본 세계의 대한민국은 이미 고구려라는 위대한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 봐야 한다. 그 역사관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아우르는 ‘중요한 핵심’ 즉,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위치를 통해 눈으로 직시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다 보면 우리 조상의 숭고한 얼과 진취적 기상은 현재 미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2세들에게 들려주는 문화융성의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알게 해주는 광개토대왕비에 얽힌 내용과 고구려의 위상을 다시 한번 알게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