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칼럼 (이근형 목사) – 새해를 산다는 것 (2): 묵상의 복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는 데카르트의 말이었던 것 같다.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던 파스칼도 있었다. 이제는 사람을 묵상하는 존재라고 생각을 좀 바꾸어 보면 어떨까? 생각에 골몰해 있는 사람은 다른 소리가 잘 안 들린다. 묵상에 잡히거나 기도에 잡히면 그런 상태가 된다, 세상에서 다양한 생각은 자유다. 그 자유는 딴 생각을 너무 많이 하게 만든다. 그러나 생각은 성경의 묵상에서 나오는 생각일 때 가장 안전하고 평화롭다.
그래서 묵상은 성경을 생각하는 것이다, 묵상은 성경을 읽을 때 필요한 말이다. 묵상은 천국의 씨앗 같은 것이어서 늘 살아 있다. 묵상은 사람을 바꾸는 능력이 있다. 묵상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반드시 자라난다. 속사람의 유전자가 내 몸안에 들어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속사람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자녀라는 이름이다. 그러니 성경을 묵상한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자라가는 일이기 때문에 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쉰다는 것은 자라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성경말씀은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생각의 씨앗을 제공한다. 묵상은 좋은 생각이라는 말로도, 선한 생각 혹은 말씀에 대한 생각으로도 정리해 볼 수 있겠다. 바울 사도 역시도 ‘선을 쫓으라 그리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다. 선을 쫓는 일이 곧 묵상이다.
다른 생각의 쫓음도 세상에는 많다. 명상이나 영성 또는 침묵 그리고 동양의 선, 요가 같은 것들이 다른 생각에 해당 될 것 같다. 예레미야나 다윗이나 다니엘은 명상을 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를 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에 말씀이 있었다. 그들 앞에 말씀 한마디가 들려왔다. 그 말씀대로 세계질서들과 이스라엘의 운명이 걸려있음도 너무 분명하게 알았었다. 그 움직임에 눈을 뜬 사람들을 선지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두 번째 나타나셨을 때 하신 말씀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이것은 부르짖으라는 말이 아니고 나를 부르라는 말 정도다. 그런데 성경 번역은 고집스럽게 Call to me를 Cried out 또는 Shout for라고 번역을 한다. 아마 영원히 그 번역은 바꾸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그 이후의 사람들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만 생각하며 예레미야 33:3절 본문을 읽게 된다. 그것이 그렇게 문제일까라는 힐문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문제가 어렵게 된다. 물론 모세도 다윗도 바울도 예수도 부르짖어 기도했다. 그들은 말씀을 알고 받고 그 말씀의 진실성과 위험성을 알기 때문에 비상기도회를 한 것이다. 부르짖는 기도는 한 나라와 집단의 운명을 결정짓는 그런 기도의 방법을 말한다.
그러나 묵상은 받은 말씀을 내 개인의 것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먼저 말씀을 받아라. 그리고 그 받은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만드는 일을 위해 묵상을 하라. 좋은 약일수록 인체흡수력이 탁월하다. 받은 말씀과 들은 말씀이 나의 것이 되는 것! 이것이 묵상인데, 결국 묵상은 말씀의 소화능력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교회는 이일을 돕는 곳이다.
예수는 소화능력이 뛰어나신 분이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보통 힘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메시야를 알아보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적어도 점심도 먹지 않고 대화에 몰입되었던 예수였다. 예수가 그 여인의 아픔과 한숨들을 다 받아 소화시켰을 때 사마리아 여인의 모든 수치와 인생의 모멸감들은 모두 사라졌고 그 여인은 더 이상 그런 어둠 속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메시야를 만났기 때문이다.
묵상은 받은 말씀을 중얼거리며 나의 것으로 만들고 사람들과 만남 속에 일어나는 대화를 소화시키는 능력이다. 이것이 묵상의 방법이다. 되새김질과 중얼거림! 이것은 말씀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기술이다. 중얼거림의 한자어를 묵상이라고 한다. 묵상은 회개를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만든다. 또한 묵상은 슬픔을 가져오기도 한다. 비둘기가 구구구구 하면서 슬피 운다고 했다. 비둘기의 우는 소리를 묵상으로 이사야 선지자는 해석했다. 아마 이사야의 울음소리가 비둘기의 구구구구하는 의성어와 같았었나 보다.
우리의 묵상은 개인의 신앙을 강화시키고 성숙하게 만들 수 있다. 묵상은 기록된 말씀을 성령의 말씀으로 바꾸어 준다. 매일의 묵상은 나의 입술에서 속사람의 찬양과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이 나오게 한다. 매일의 묵상이란 온종일 말씀을 가지고서, 나의 생활의 모든 각도에서 받은 말씀을 이해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엄마가 아이를 안고 기뻐하는 모습처럼 그렇게 말씀을 품고 기뻐하면 된다. 때로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슬피 울어도 된다.
이제 묵상을 더욱 힘있게 하려면 부르짖어 기도해 보라. 말씀과 함께 부르짖는 기도가 가장 완벽한 기도다. 부르짖는 기도는 말씀을 깨닫게 하는 기회다. 기도하되 말씀을 가지고 기도해 보자는 말이다. 호세아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했다. 그 말은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겠다는 것이었다. 황소도 숫양도 가져오지 말고 말씀을 가지고 오라고 한 것이다. 너에게 말씀이 있냐고 물은 것과 같은 말이다.
묵상에 실패하지 않으려면 그리고 묵상이 나의 능력이 되게 하려면 말씀을 가지고 주 앞에 나와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주님의 선한 뜻을 만나는 것이 묵상의 결론이 될 수 있다. 작심 3일이 되면 안된다. 특별 새벽기도가 되었던 작정 기도가 되었던 기도는 계속되는 묵상을 돕는다. 그 묵상에 성공할 때 만사에 축복이 그 뒤를 따르게 된다.
인생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묵상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방식의 묵상 은 인생 그 자체에 종교의 무거운 짐을 한 개 더 얹고 사는 것과 같게 된다. 묵상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살아 있고, 살아가는 기도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새해를 살아간다는 것은 묵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느냐가 결정할 것 같다. 성경은 묵상하라는 책이며 우리의 생각에 ’절대 선‘의 씨앗을 뿌리는 책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묵상하는 존재다. 이제는 내가 살지 않는다!

이근형 목사 (맥알렌제일한인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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