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칼럼 (송영일 목사) – 다 이루었다(3) :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성경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최후 모습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30)
6시간 동안 십자가상에서 신음하시다가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고개를 떨구셨다. 드디어 운명하신 것이다. 성경은 그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다 이루시고” 본래의 자리로 “떠나가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운명을 “떠나가셨다”(파라토켄토 프뉴마)는 말은 “주께서 곁에서 함께한 자기 영혼을 스스로 떠나보내셨다”는 뜻이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적어도 외관상으로 우리가 말한 “돌아가셨다”와 예수님이 “떠나가셨다”는 말은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상반된 용어이다. 우리가 사람을 가리켜 “돌아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수동적으로 사용된다. 사람들은 돌아갈 의사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하여 발버둥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타력(他力)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최후를 묘사하고 있는 동사 “떠나가시니라”의 헬라어 (파라토켄토 프뉴마)는 그와는 정반대로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give up”, “포기하다”, “능동적으로 떠나보낸다”는 의미이다. 누군가의 강압에 의해, 타력에 의해,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인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스스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한 것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하시고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라”(요10:17)고 하셨다. 그리고 “내 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요10:18)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목숨을 버리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셨기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지 결과였을 뿐이다. 예수님은 골고다의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에 의해 체포 당하기 전에, 대제사장들이 음모를 꾸미기 전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기 전에, 이 땅에 성육신 하실 때, 이미 당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어놓으시려고 자발적으로 내어 놓으시려 하셨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주님의 그 귀한 생명을 내어 놓으셨을까? 죄인 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의 값은 오직 사망이다.”(롬6:23) 그렇기에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러 주시려고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려고 창조주의 귀한 생명을 아낌없이 자발적으로 내어 놓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에 의해 체포될 당시 놀란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하여 칼을 휘둘러 “말고”의 귀를 내리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귀를 고쳐 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영(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26:53)
당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다만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미 당신의 생명을 포기하셨다. 위대한 십자가 구원의 사건은 예수님의 능동적인 “자기 버림” “자기 포기” 위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오늘 두 가지의 진리를 마음 속에 되새길 수 있다.
첫째는 자기를 자발적으로 버릴 때에만, 자기를 능동적으로 포기할 때에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참 생명이실 수가 있었을까? 당신 자신을 스스로 버리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나무기둥에 불과한 십자가가 영원한 구원의 표징일 수가 있었을까?
그 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포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째로 오늘 우리가 고백해야 할 말은, 우리도 “다 이루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욕망이나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진리의 말씀을 지향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해 성취되어가야 한다. 돈을 벌더라도 나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지식을 구해도 지식의 노예가 아니라 진리를 위하여, 가정을 꾸려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무엇을 행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 될 때, “다 이루었다”고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newlife0688@gmail.com
(832)205-5578
www.houstonnewlif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