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칼럼 (송영일 목사) – 그리스도인이 따라가야 할 삶의 방식
예수님의 일생을 보면 사역의 80% 이상을 갈릴리에서 보내셨다는 걸 알 수 있다.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탄생하셨지만,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위협을 피해 부모님과 함께 애굽으로 피신을 갔다가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오면서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정착하셨다(마2:14).
복음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하고 갈릴리에서 마치셨다.
승천하신 장소도 갈릴리에서 하셨다(행1:11).
심지어 부활후에도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셨다(요21).
예수님의 일생과 갈릴리의 관계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왜 예수님은 생애의 시작과 마침까지 갈릴리에 집착하셨을까?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불행한 소식을 듣고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마4:12)
해답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려 하신 것이었다(마4:13-14)
예수님의 모든 발걸음 한 걸음마다, 말씀 한 마디마다, 행동 하나하나마다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갈릴리에 대한 구약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나사렛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짓밟히고 소외되고 천대받았던 동네였다.
북쪽으로는 앗수루와 남쪽의 애굽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날 때 마다 갈릴리를 거쳐가면서 상처받고 빼앗기고 짓밟혔다.
부친 다윗의 친한 친구였던 두로의 왕 히람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할 백향목과 수많은 재료들을 공급해 주었다.
그 답례로 불모지의 갈릴리 땅을 내어 주었는데 히람이 갈릴리 땅을 돌아보고 “눈에 들이 아니하여… 가불땅이라(황폐한 땅)”(왕상9:12)고 했을 정도로 거칠고 쓸모없는 땅이었다.
그런데 선지자 이사야는 소외되고 버려진 갈릴리가 장차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나6:16)고 예언했다.
“큰 빛”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큰 빛”이 오셔서 소외되고 버려지고 이름없는 갈릴리를 비췰 것이라는 말씀을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중앙에서 시작한 적이 없다.
항상 변두리의 무관심한 곳, 소외된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천국은 겨자씨 같은 작은 씨앗에서 시작되었다.
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선택하셨는가?
작은 민족이기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
갈릴리는 큰 도시도 아니고 부유한 동네도 아니고 슬픈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멸시받고 소외된 동네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시고 소자 하나라도 실족케 하지 말라 하셨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잡힌 자를 돌아보고 헐벗은 자에게 입히라 하시고 그들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주님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 하셨다(마25:35-40).
그렇다.
예수님은 죄악이 넘치는 버려진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구원의 빛을 비춰 주셨다.
예수님처럼 버려진 곳에 관심을 가지고 슬픔이 있는 자들에게 위로를 주고 아픔을 가진 자들에게 손길을 내어주는 것이 교회의 사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윗이 억울하게 사울 왕의 추격을 받고 도망을 다닐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낸 사람들이 누구였는가?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22:2)
다윗은 버려진 6백명이 모여 장차 왕권 40년을 그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교회는 힘있고 능력있는 사람들보다는 차라리 소외되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이 모여서 새 힘을 얻고 위로를 받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주님을 더욱 기쁘게 하는 교회가 아닐까?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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