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칼럼 (송영일 목사) – 과연 누가 의(義)로운 사람일까?
수 많은 사람들은 각자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다. 이를 “自己義”(자기의)라고 한다. “자기의”가 강한 사람은 자칫하면 교만하게 된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매우 싫어하신다. 그래서 잠언 16:18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한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잠16:5)고 하셨다. “자기의”가 강하면 내 말이 옳고 상대방의 말이 옳아도 틀렸다고 강변한다. 소수의 정의로운 사람들도 역시 그들의 의가 옳다고 강변한다.
사회적인 의(義)는 어떤가? 하버드 대학교 교수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 지은 정치철학서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라는 유명한 책이 있다. 샌델교수가 말한 정의는 세 가지의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 가지 기준은 “행복, 자유, 미덕”이다. 정의가 사회 구성원의 행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 혹은 사회 구성원 각각의 자유로움을 보장할 수 있는지, 아니면 사회에 좋은 영향으로 끼쳐야 하는지로 정의로움을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 세상의 사회적인 의는 강자가 의고 재력있는 자가 의라고 여긴다. 우리 편만 정의롭고 반대편은 진정으로 의롭다 할지라도 의롭지 않다고 말한다. 내 입맛에 맛지 않는 것은 다 악이고 내 편은 다 정의롭다고 우긴다. 약자가 아무리 진정한 의를 외쳐도 세상은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회적 의의 모순이다.
성경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의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들의 의의 기준은 율법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의였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여인을 가운데 두고 어린아이들과 어른에 이르기 까지 많은 사람들이 돌을 들고 던지려던 찰라에 예수님께서 현장에 등장하셨다. 왜 그들은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했을까? 율법이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율법대로 처단하는 것이 정의를 세우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거기 붙잡혀 온 사람은 여인뿐이었다. 함께 간음했던 남성은 어디갔는가? 함께 간음을 했어도 남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여성에게만 죄를 물어 죽이려했다. 사회적으로 힘있는 남성들에게는 간음죄를 적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정의는 힘있는 자의 것이었다. 이것이 의의 모순이다.
마태복음 1:19에 보면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동정녀 마리아가 정혼을 했는데 임신을 했다. 당시 율법에 정혼을 해도 육체적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만일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동네사람들이 알게 되면 마리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신22:23-24)
요셉은 정혼자 마리아가 율법에 따라 꼼짝없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되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소리소문없이 아무도 모르게 파혼을 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율법을 어긴 요셉을 왜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을까? 요셉을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의 판단은 무엇인가? 긍휼이다. 사랑으로 덮어주고 가려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다. 예수님은 의의 기준을 이렇게 정의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당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누가 가장 의로운 사람들이었는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 그들은 사회적 기득권자들이었다. 율법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의롭다 하면 불의한 것도 의롭게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하게도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무슨 뜻일까? 그들의 의는 율법적 의였다. 행위적 의였다.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천국을 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은 무엇인가? 십자가이다. 예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행위적 율법과 어떤 조건으로도 의롭게 될 수 없음을 아셨다. 그래서 더 낳은 의를 예비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엡2:4-5)
율법은 죄를 까발려 법대로 죽이려하지만 긍휼은 죄를 덮어 준다. 햇빛에 금방 말라버릴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고 에덴동산을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뒷모습을 바라보시고 가슴이 아픈신 여호와께서는 양을 죽여 피를 흘려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보내셨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추악한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속죄의 제물이 되어 피흘려 죄악을 씻어주시고 부끄러움을 가리워주고 의의 옷을 입혀 주심으로 어린양께서 대신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대신 가셨다. 예수님께서 주신 의를 받아들일 때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의로운 자라 칭함을 받는다. 바로 그것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낳은 의이다. 이 의를 가진 자만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의를 원하신다.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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