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칼럼 (송영일 목사) -고통을 피할 수 없거든 고통의 친구가 되라

암 전문가인 한만청 박사가 쓴 “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돼라”는 책이 있다.
보통 암 진단을 받으면 대부분 분노하다가 자포자기를 하며 시간을 소모시킨다.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암과 친구가 되려고 마음먹으면 죽음의 공포와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암을 이겨낸 많은 경험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마음을 비워야 몸이 산다”는 것이다.
고통없는 세상은 없을까?
우리 인생에 고통없는 날이 많을까 아니면 기쁜 날이 많을까?
누구든지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이 말씀을 잘 들여다 보면 아무도 고통이 찾아오는 걸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고통의 친구가 되면 어떨까?
아주 오래 전에 “토마스 모아”가 쓴 “유토피아”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유토피아”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꿈꾸고 있는 이상향(理想鄕)의 세계가 그려져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 있다는 가상(假想)의 그 섬나라에서는 누구나 다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살면서 고통 없이 즐겁게 일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곳에서 개인 소유의 땅이나 재산이 없고,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다.
그런데, “유토피아”라는 말은 “아무데도 없다”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이다.
결국 저자 토마스 모어는 “이 세상 아무데도 그런 나라가 없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고통없이 편안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 많은 사람들은 평생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속절없이 죽어가기도 한다.
아무런 약속없이 찾아오는 죽음이 얼마나 비참하고 슬픈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시체 앞에서 통곡하고 우셨다.
인생의 기쁨은 잠깐이고, 대부분 많은 고생과 수고만 하다가 빈손으로 가야만 한다.
이처럼 빈손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더 소유하려고 안달을 한다.
그것이 인간의 고통이다.
예수님은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인생은 고독과 고통과 고난 그 자체였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9:58/마8:20)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말씀이다.
이 땅에서 두 벌 옷도 가지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우리처럼 사시다가 우리처럼 슬퍼하셨다.
자기 맘대로 살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 뜻대로 살았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으시고 오직 추하고 더러운 우리를 위하여 사셨다.
오직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인생의 최고목적이었다.
하나님의 뜻의 절정은 십자가였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와 친구가 되었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허물을 대시 지시고,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대신 겪으시고, 모든 저주를 대신 지시고, 모든 심판을 대신 받으셨다.
한 마디로 고난의 친구가 되셨다.
그러므로 고통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며 승리하실 수 있었다.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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