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칼럼 (류복현 목사)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전도서 1:1-4)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그는 백악관 현관 앞에서 구두를 닦고 있었습니다. 비서가 이 광경을 보고는 너무나 미안하고 송구스러워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말했습니다. “각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떻게 된 일이라니?” “대통령의 귀하신 몸으로 구두를 닦으시다니요. 이게 말이 됩니까?” 링컨 대통령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시면서, “제임스, 자기 구두를 자기 손으로 닦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어찌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런 것이 아니오라, 구두를 닦는 일은 천한 일이온데 각하께서 손수 구두를 닦으시는 것은 황송한 일이옵니다”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야. 대통령도 구두닦이도 다 같이 세상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일세. 세상에 천한 일이란 없는거야. 나도 어렸을 땐 구두닦이도 하였었지” “각하 하지만 지금은…” “대통령이니까 할 수 없다는 말이겠지? 세상에 천하고 귀한 일이 따로 있는게 아니야. 다만 마음이 착하냐, 나쁘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네” 비서는 대통령의 겸손하고 사리에 맞는 말에 감탄하였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항상 자기 일은 자기가 하시며 사람들에게 많은 산 교훈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러더 위트락의 ‘영적 성숙’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마치 인생의 목적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거지같은 삶을 산다면 오래 사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건강과 장수가 이 시대에 이념화 되어 버렸습니다. 오래 살면 문제는 건강하느냐? 그리고 먹고 살 능력이 있느냐입니다. 노년의 생계가 힘들고, 황혼 이혼이 갈수록 문제가 되는 것을 보면 ‘어떻게 사느냐’라는 ‘삶의 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전도서는 솔로몬의 회고록 같은 성격의 책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삶의 교훈을 주는 지혜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와 지식이 풍성한 왕이었고, 세상의 온갖 호사를 다 누린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책은 결론적인 말로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지혜와 지식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누렸던 부귀영화도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 하느니라” (1:18) 고 합니다. 젊음도 헛되다고 하여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11:10)고 합니다. 그 외에 은과 금, 쾌락이 헛되고,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고 어마어마한 궁전을 지었지만 이것도 다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솔로몬과 같이 세상에 없는 것이 없이 다 가진 자가 헛되다고 하니까 헛된 것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가 헛되다고 하면 단순한 푸념이겠지만 가진 자가 헛되다고 하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잠언에는 직접적 교훈이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지혜를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전도서에는 인생의 역설적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생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헛된 것을 아는 것도 지혜입니다.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운 것이 나쁘고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삶의 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다윗은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국민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평생 전쟁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국가를 위한 전쟁을 하였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가정적 전쟁도 치렀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므로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책망의 소리를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불렀고,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게 하셨습니다. 반면에 솔로몬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온갖 최고의 영화를 다 누렸고, 생전에는 그의 삶은 승리한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사후에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실패한 삶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 대에 가서 국가가 분열되어 나라가 남과 북으로 나뉘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솔로몬의 자손이라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말합니까? 솔로몬의 승리 같은 패배가 아니라 다윗의 패배 같은 승리가 주님의 승리입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패배할 것 같은 승리를 하신 주님이십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1:3-4) “무엇이 유익한가?”라는 질문에는 답은 없지만 없다는 뜻을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가 유익한 것이 없다는 고백은 실로 충격적입니다. 그러면 수고는 왜 해야 합니까? 인생에서 한 세대는 금방 지나갑니다. 금방 눈 깜빡할 사이에 세월이 지나버리고 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가변적입니다. 그래서 헛되고 무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신 땅은 영원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doing) 보다는 어떤 사람인지(being)에 더 관심을 두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유익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이 절망이나 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시베리아에서 최고의 형벌은 얼어붙은 땅을 팠다가 다시 묻게 하고, 또 파게 하고 묻게 하는 일을 계속 반복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같은 일을 계속 시키면 실성해 버리고 만답니다. 의미 없는 일을 계속한다는 것은 지옥과도 같은 것입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좀 일찍 깨닫고 철이 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일이 터지기 전에, 미리미리 사전에 예비하고 방책을 세우면, 그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지 않고 절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고 나서야 그 일을 깨닫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뒤 늦게 지나고 나서야 ‘그렇게 할 걸.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탄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늦게 철이 든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아라” 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기억하고 우리 모두가 우리 인생을 멋지게 살고 마무리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류복현 목사 (킬린한인침례교회 담임목사. 254-289-8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