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칼럼 (류복현 목사) – 부활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11:25-26)
인도에서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노방전도를 하고 있는데, 이슬람교도 한 사람이 설교 중간에 나서서 외쳤습니다.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못 가진 것 한 가지를 가졌소.” 그러자 그가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오?” “우리는 메디나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이 있어서 정말 마호메트란 사람이 역사적으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소. 하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빈 무덤 밖에 볼 수 없지 않소?” “고맙소.” 스탠리 존스는 이렇게 대답한 뒤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의 말이 그대로 사실인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다른 점이오. 우리의 주님은 부활하셨소.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빈 무덤 밖에 없는 것이오. 당신들은 죽은 교주를 믿고 있지만 우리는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믿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가 부활하는 두 가지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1. 부활이신 예수님
열왕기상 17장에 놀라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르밧이라는 이방 지역에 한 과부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엘리야가 죽은 아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죽은 아이를 살려 준 것이 아니라, 부활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열왕기하 4장에도 놀라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넴이라는 동네에 한 여인이 살고 있는데 선지자 엘리사가 그 지역을 갈 때마다 모셔서 식사를 대접하고 방을 준비하여 주고 책상도 준비해 주고 등불도 준비를 해줍니다. 그런데 그 집에 아들이 없었습니다. 남편을 늙었다고 했습니다. 엘리사의 기도로 아들을 낳게 됩니다. 잘 크다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죽었습니다. 갈멜산에 있던 엘리사가 그 집에 와서 죽은 아이를 살려줍니다. 역시 이사건도 부활을 가르쳐 주신 사건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이 직접 죽은 사람을 살려준 사건이 있습니다. 죽은지 4일이나 지나고 썩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려주십니다. 나인성에 사는 한 과부의 아들도 죽어서 장례식을 치르고 상여에 싣고 묻으러 가는 도중에 예수님이 그를 살려 주십니다. “나는 부활이다” 고 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죽은 사람을 살려주시면서 부활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이 있음을 확실히 잘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도 편지하면서도 마지막 날에 예수님 재림하실 때 부활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생명이신 예수님
에녹은 365살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 하니라. (창 5:21-24)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한 천국으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르쳐 주신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이 어디있느냐고 합니다.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사렸던 선지자 엘리야도 이 땅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후계자 엘리사에게 사명을 인수인계하고 엘리사가 보는 앞에서 요단강에서 회리 바람을 타고 승천합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하나님, 예수님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부활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삽니다.
신앙은 흉내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 불교가 극성스러울 만큼 기독교를 모방합니다. 기독교가 하는 많은 행사를 따라 합니다. 한국에 갔을 때에 택시를 타고 가는데 아마도 운전기사가 불교신자인 것 같았습니다. 라디오에서 목사님의 설교인줄 알고 한참 듣다보니 스님이 설법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들의 설교와 너무나도 흡사해서 놀랐습니다.
성경학교를 흉내 내어 여름불교학교를 하는가하면 주일학교, 수련회, 부흥회, 선교원, 심방, 주일예배, 철야기도 등을 유사하게 흉내 내어 다 따라 합니다. 심지어 성탄절처럼 석가 탄신일도 있습니다. 감사절기가 있고 특별기도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절은 없습니다. 그 어떤 종교도 기독교의 부활절을 흉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자들이 무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흉내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신령과 진정으로, 영과 진리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종전되기 얼마 전인 1945년 4월 8일은 부활주일이었습니다. 당시 종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하고 있던 히틀러는 전쟁이 끝나기 전 자기의 정적들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많은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작정한 대상자들 가운데 하나가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 목사였습니다. 그 부활주일 아침, 본 훼퍼 목사가 감방 동료들과 함께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감방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이 들어와 본 훼퍼 목사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마지막 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군인들에 의해 끌려 나가는 본 훼퍼 목사를 보면서 함께 수감되어 있던 영국 군인들이 비통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마지막이군요. 안녕히 가십시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인사에 본 훼퍼 목사는 오히려 미소를 띠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오. 지금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지금이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본 훼퍼 목사가 한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 뜻은 자신이 이 땅에서 죽음을 맞는 시간이 자신의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눈 앞에 다가온 죽음 앞에서도 본 훼퍼 목사는 공포와 비통함 대신 평안과 소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독일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담당 군의관 베스게 (Martin Baethge)는 1945년 4월 9일 일기를 이렇게 썼습니다. “히틀러에 의해 독일의 장성들도 사형을 당하고 외국인들이 사형을 당했다. 오늘 새벽 5시와 6시 사이에 카나리 제독과 오스트 장군을 포함한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그중에 나의 영혼을 사로잡은 사람은 본 훼퍼 (Dietrich Bonhoeffer) 목사였다. 그는 처형장으로 끌려가기 전에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었다. 교수대에 올라가서도 잠시 기도했다. 지극히 평화롭게 보였다. 오랫동안 사형수를 보았지만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나는 그런 죽음을 본 적이 없다. 저렇게 평안하고 기쁘고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도 부활함을 믿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믿습니다. 아멘.
류복현 목사 (킬린한인침례교회 담임목사. 254-289-8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