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칼럼 (류복현 목사) – 다윗과 요나단 (요한복음 15:13-15)
1. 네 종류의 친구
친구에는 4가지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꽃과 같은 친구. 꽃이 피어서 예쁠 때는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꽃이 지고 나면 돌아보는 이 하나 없듯 내가 좋은 때만 찾아오는 친구는 바로 꽃과 같은 친구입니다. 둘째 저울과 같은 친구. 나에게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 이익이 큰 쪽으로만 움직이는 친구가 바로 저울과 같은 친구입니다. 셋째 산과 같은 친구. 산이란 온갖 새와 짐승의 안식처이며 멀리 보거나 가까이 가거나 늘 그 자리에서 반겨줍니다. 그처럼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마음 든든한 친구가 바로 산과 같은 친구입니다. 넷째 땅과 같은 친구. 땅은 뭇 생명의 싹이 태어나고 곡식을 길러내며 누구에게도 조건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지지해 주는 친구가 바로 땅과 같은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힘들 때에도 찾아오시는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보 같은 행동을 하고,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못한 삶을 살 때도 찾아오시는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산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서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땅처럼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여러분의 평생의 친구로 삼고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어머니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사랑 혹은 친구라고 합니다. 성경은 친구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서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마므레, 에스골, 아넬이었습니다. (창14:13) 이들은 서로 동맹하고 어려울 때 함께 도왔습니다. 그들은 히브리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과 동맹을 맺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욥의 세 친구가 있습니다. 소발, 엘리바스, 빌닷이었습니다. 욥이 고난당할 때 멀리서 위로하러 왔습니다. 결과적으로 욥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이로 인해 욥이 또 다른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친구가 고슴도치처럼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면 그 상처 때문에 내가 더 성숙해 질 수도 있습니다. 그 상처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관계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슬픈 우정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두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차기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적수가 나타났습니다. 다윗입니다. 참 악연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가문 같은 사이가 됩니다. 원수라기 보다는 적수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자신이 차기 왕이 아닌 다윗이 차기 왕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 집안에서 촛대를 옮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슬펐습니다. 좋게 표현하니 아름다운 우정이지, 사실은 슬픈 우정입니다.
사울 왕에게 다윗은 참 좋은 백성이요 신하입니다. 그런데 백성들 사이에서 사울 자신 보다도 다윗에게 더 관심이 쏟아짐을 느끼게 됩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이 말은 사울이 죽인 사람이 천명이라면 다윗이 죽인 사람은 만 명이다는 말입니다. 워낙 전쟁이 많은 시대이고 이스라엘은 약한 국가이고 주변 국가들은 강대국들입니다. 수시로 주변에서 이스라엘을 침략해 옵니다. 그러니 전쟁이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골리앗’ 이스라엘의 군대가 벌벌 떨고 있을 때 어린 다윗은 창과 칼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멧돌 하나를 던져 골리앗의 이마를 맞히자 그 큰 거구가 땅에 쓰러집니다. 다윗이 달려가서 칼로 그를 죽입니다. 마치 사냥하듯 죽였습니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 소식이 온 이스라엘에 전해지자 다윗의 인기가 날로 날로 상승합니다. 사울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질투심에 머리가 아픕니다. 그래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죽여야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 때 장자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에게 만류합니다. “죽이면 안됩니다.” 그래도 사울은 다윗을 죽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다윗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도망가라고 합니다.
2.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합니다 (삼상18:1)
“요나단의 다윗에 마음이 끌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함에 있어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저울질 하지 않았습니다. 득이 되나 손해가 되나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사랑한 것입니다. 왜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요나단이 다윗보다 나이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관계를 친구라고 부릅니다. 왜 친구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물어봐야겠습니다. 정말 친구가 맞느냐고요.
인간의 비극은 종종 사랑해야 하는 대상을 이용하고 사용하려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해야 할 친구가 이용 대상으로 바뀌고 사용해야 할 물질이 사랑의 대상으로 바뀔 때 사람은 불행해집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원토록 계시느니라’ (삼상 20:23)
다윗에게 피하라고 말하고는 ‘하나님이 너에게 평안을 주시고 너를 지켜주시므로 무사할 것이다. 너는 돌아 올 것이다’ 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합니다. (삼상 20:21)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입니까? 반면 얼마나 슬픈 우정의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이 순수하게 깊어질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 사이에 하나님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맺어진 우정이기에 진실함이 영원히 변치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둘 사이에 하나님 대신 돈이나 사업이나 권력이나 인간의 욕심이 끼어 있었다면 쉽게 변질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만난 사이는 변하질 않습니다.
3.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 앞에서 다윗을 변호합니다.
참된 우정은 언제나 친구를 보호해 줍니다. 변호해 줍니다. 칭찬해 줍니다. 그가 비록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도 변호해 주는 것이 친구입니다. 아버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에 요나단은 다윗을 변호합니다. 요나단은 갈보산에서 블레셋과 전투 중에 아버지와 동생들과 함께 전사합니다. 요나단에게 남겨진 5살짜리 아들 므비보셋이 있었습니다. 유모가 므비보셋을 안고 도망가다가 떨어 뜨려서 두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훗날 왕이 된 다윗이 사울의 집안에 살아남은 자가 있는지 물었을 때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를 데리고 오라 하고, 네 아버지 요나단에게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두려워 하지 말라. 네 할아버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주겠노라. 너는 나의 왕자 중 하나처럼 왕궁에서 나와 함께 살고 내 밥상에서 같은 먹으리라. (삼하 9장)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요나단의 우정의 결과입니다. 그 열매가 아들 므비보셋에게 돌아갑니다. 요나단도 다윗도 참 멋있는 사람입니다.
친구는 정말로 소중합니다. 친구를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친구관계를 잘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류복현 목사 (킬린한인침례교회 담임목사. 254-289-8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