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칼럼 (류복현 목사) – 겸손한 사람 (누가복음 18:13-14)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 이야기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그는 백악관 현관 앞에서 구두를 닦고 있었습니다. 비서가 이 광경을 보고는 너무나 미안하고 송구스러워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말했습니다. “각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떻게 된 일이라니?” “대통령의 귀하신 몸으로 구두를 닦으시다니요. 이게 말이 됩니까?” 링컨 대통령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시면서 “제임스 군, 자기 구두를 자기 손으로 닦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어찌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구두를 닦는 일을 천한 일이온데 각하께서 손수 구두를 닦으시는 것은 황송한 일이옵니다”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야. 대통령도 구두닦이도 다같이 세상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일세. 세상에 천한 일이란 없는거야. 나도 어렸을 땐 구두닦이도 하였었지” “각하 하지만 지금은…” “대통령이니까 할 수 없다는 말이겠지? 세상에 천하고 귀한 일이 따로 있는게 아니야. 다만 마음이 착하냐, 나쁘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네” 비서는 대통령의 겸손하고 사리에 맞는 말에 감탄하였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항상 자기 일은 자기가 하며 사람들에게 많은 산 교훈은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겸손하게 살아간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런 모습을 본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겸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자기 자랑 일색입니다. 자기의 행위가 다 옳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의견만 내세웠습니다. 도덕적 우월도 내세웠습니다. 세리들처럼 토색하지 않고 불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리와 같지 않음에 대하여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다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교만했습니다.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합니다. 소득의 십일조도 드립니다.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치 못한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비판이나 정죄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비판이나 정죄는 교만입니다. “나는 너보다 더 잘 믿는다. 나는 너보다 더 경건하다. 나는 더 의롭고 깨끗하다” 하는 생각이 영적 교만입니다.
•그러나 세리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13절)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했습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합니다. 죄에 대한 회개하는 애통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3-4)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아가 십자가를 통하여 철저하게 부서지고 깨어진 상태입니다. 자신은 그리스도안에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내 자아가 돌같이 단단하다면 깨어져야 합니다. 내 자아가 성처럼 튼튼하다면 무너지고 부서져야 합니다. 내 자아가 얼음같이 단단하면 녹아져야 합니다.
세리를 보십시오.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오직 긍휼을 구하고 있을 뿐이요. 돈이나 명예나 지식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자비와 긍휼을 구했을 뿐입니다.
•약속된 축복 (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겸손하라”는 것이 처세술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겸손한 행동(humble behavior)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실로 겸손한 존재(humble being)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의 흉내만 내는 자들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에 겸손함이 있어야 합 니다. 우리가 겸손해야만 이웃과의 관계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그들이 높여 주는 것입니다. 내가 높아지려고 해서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슈바이처 (A. Schweitzer 1875-1965 독일 루터교신학자. 철학자. 음악가. 아프리카 선교사. 노벨평화상 수상)가 자기 재산을 모두 병원 유지를 위해 기부했으나, 그것으로는 몰려드는 환자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는 각지로 다니며 부득이 모금운동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자기 고향인 알자스에 들르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친지와 동료 그리고 각계 인사들이 기착역에 모여 영접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기차가 도착하자 환영 나온 사람들과 기자들은 1등실 앞으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허둥대는 사람들의 눈에 맨 뒤 칸 3등 열차에서 내려 초라한 모습으로 플랫폼으로 걸어 나가는 한 남자가 보였습니다. 그가 바로 슈바이처 박사였습니다. 사람들이 달려가서 그를 붙들고 “아니, 박사님! 어째서 3등 칸을 타고 오셨습니까?” 하고 원망스럽게 물었습니다. 그 때 슈바이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4등 칸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3등 칸을 탔습니다”
류복현 목사 (킬린한인침례교회 담임목사. 254-289-8866)